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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인 설교를 위한 이야기설교(장신대,김운용교수님자료)

서사설교 Ⅰ - 이야기를 통한 설교 방법

인간 삶과 이야기

쟌 도미닉 크로산은 “물고기가 물에서 사는 것과 같이 사람은 이야기 속에서 살아간다”고 했다*1. 사실 사람들은 누구나 이야기를 좋아하며, 이야기와 함께, 이야기에 묻혀서 살아간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건들을 경험하게 되며, 그 이야기를 통해서 개인적인 간격과 시간적 간격을 좁혀 나간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종교적 이야기들과 개인적인 경험과 함께 엮어져 가는 이야기들 속에 뿌리를 두고 살아간다.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낳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람들은 함께 연결되어 가며, 인간적인 결속을 다져 나간다. 또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며, 오늘에서 그것을 기대하면서 비전으로 공유하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는 인간 삶의 기본적인 양식일 뿐만 아니라 의미를 가져다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세계에 대한 경이감과 그 세계와 관련된 존재와의 교감을 가지면서 사람들은 경험하고 어떤 사실을 새롭게 인식해 간다. 이야기는 추상적인 개념들을 구체화시키며, 인간 삶이 갖는 의미들과 깊은 연결을 지어 준다. 이야기에는 뛰어난 수용성과 전달력이 있으며, 기억하는데도 뛰어난 장점을 가진다. 이야기는 청중들로 하여금 말씀을 가장 잘 이해하도록 도와 주며, 사람들의 감성적인 부분을 고양시켜 주면서 오래 기억하도록 해 주며,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들의 삶은 이야기로 채워져 왔고, 이야기에 의해서 아름답게 채색되어져 왔다. 사람들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시작될 때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며,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기대하게 된다. 이야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단순하게 이야기가 전달해 주는 사실 이상의 무엇인가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한다. 효과적인 이야기는 그것이 끝난 다음에 말하는 사람의 마지막 단어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가슴속에서 새로운 싹이 움터오게 하는 어떤 씨앗을 남기기 마련이다. 강력한 이야기는 무엇인가가 일어나게 하며(do something), 그것이 일어나게 하는 효과가 있다(effect something).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아 그래요. 요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겠어요” 하는 정도로 사람들은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이야기 속에 빠져들며, 그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어떤 것이 드러날 때, 우리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고,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의 내용에 대해서는 놀라기도 하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그 장소와 사건 속으로 함께 끌고 들어가서 그것들을 함께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등장인물(character)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동일시(identification)를 갖게 한다.

이렇게 이야기는 세계를 형성하고 변혁하는 힘을 갖는데, 기본적으로 개인의 세계관과 생활 방식에 있어서 그것들을 형성하고 변혁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야기는 보다 넓은 자아 인식과 사회 인식을 갖도록 할 뿐만 아니라 상상력을 자극하여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쉽게 전달되지 않는 실재들을 볼 수 있게 하며, 문화적 가치들과 행동 양식들이 이야기를 통해 형성되고 변혁된다. 이렇게 이야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신선한 묘사들, 즉 새로운 관점들이나 새로운 전망들을 소개하면서 새로움”을 더해 준다.

성경, 설교, 그리고 이야기

이렇게 어떠한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이야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단순한 하나의 테크닉 이상의 것이다. 왜냐 하면 이야기는 인간 의사 소통의 중요한 양식이며, 문화의 전달 통로이고, 잠재적으로 심오하고 원대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때 여러 이야기(비유)를 사용하셨을 것이다. 그분은 개념이나 조직적인 논리를 통해서 어떤 진리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시지 않으시고 늘 이야기를 즐겨 사용하셨다. 이야기의 효과성(effectiveness)이나 탁월성 때문만이 아니라, 이야기는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복음을 전달하시는 예수님의 방식이었다. 좋은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는 한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 “좋은 이웃이란 첫째 ……, 둘째 …… 이다”와 같이 논리적으로 정의하려 하시거나 논증적으로 증명하려 하지 않으시고,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로 시작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그 어떤 정의보다도 선명하고 훌륭하게 이웃에 대해 정의를 내리셨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야기(비유)를 들으면서 청중들은 여리고로 가는 길목에 서게 되며, 그 아픔과 고난의 현장에 동참하게 된다. 가슴을 파고들 듯이 밀려오는 메시지, 참 이웃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온 가슴으로 담게 되며, 느끼게 된다. 그래서 에이모스 윌더(Amos Wilder)는 복음의 바로 핵심적인 본질은 이야기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주장한다*2. 예수님이 이야기를 즐겨 사용하신 것은 청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적인 특성 때문에 그리하셨다는 것이다. 복음의 구조는 잘 갖추어진 논증을 통해, 즉 일련의 개념(idea)들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정의하고, 삼단논법과 같이 논증하는 것도 아니며, 종교적인 정의를 열거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메시지를 삼단논법이나 지적인 논증, 혹은 정의로 바꾸어서 전한다면 복음 그 자체의 본질적인 특성을 변형시키는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크래독은 복음 “메시지의 본질적인 구조는 언제나 이야기(narrative)의 특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3.

구약의 대부분도 이야기로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스리시며,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 다스림 가운데서 살아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시대를 넘어서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현존과 역사를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경험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억하고(remembering), 이야기하면서(telling) 그 사건들을 새롭게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야기(storytelling event)를 통해 현존하신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는 형성되고*4, 거룩한 이야기들을 되뇌면서(retelling)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고, 미래의 사건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은 그 자체가 이야기의 특성을 가진다”고 말한 웨인 로빈슨(Wayne B. Robinson)의 주장은 옳다*5. 우리는 구약 성경의 중심에서 그러한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이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와 엎드렸을 때,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narrative)를 통해 예배자들에게 들려 줄 것을 제사장들에게 부탁하고 있다. “너희를 구원했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잘 섬겨야 한다”는 명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유리 하는 아람의 이야기”(신 26:5-9)를 통해 하나님 구원의 역사를 말하라고 명령하신다.

왜 성경은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야기를 사용하고 있는가? 복음은 이야기의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며, 복음의 중심으로 엮어지는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이야기의 특성을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이 그러하듯이 우리 개인의 신앙 여정도 주님이 세례받으시고, 공생애의 삶을 사시며, 죽음으로, 그리고 부활로 옮겨가는 것과 같은 이야기의 특성(narrative quality)을 가진다. 사람들은 이야기 안에서 자신을 인식할 수 있고, 설교의 다른 수단을 통해서 일어나지 않은 것도 이야기를 통해서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다. 이야기(narrative)는 하나님과 세상(world)을 드러내는 도구였으며 사람들도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을 노출하고,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나님께서도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선명하게 노출시키고 계시하시는 장(場)으로 삼으셨다*6. 이렇게 복음의 본질적인 특성은 이야기의 형태를 통해서 전달된다. 그래서 부머샤인은 복음은 본래 “이야기로 말하는 전통”(storytelling tradition)이었다고 주장한다*7.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이야기를 사용한 다른 이유는 이야기가 본질적으로 경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말하고 듣는 것은 우리의 삶의 경험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경험은 본질적으로 이야기의 특성을 가진다. 우리 삶은 이야기와 같이 하나의 에피소드 뒤에 다른 에피소드들로 이어지면서 채워진다. 우리가 서로를 알아 가는 방식의 하나도 우리의 이야기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말해질 때, 공동체는 형성되며 서로가 서로를 깊이 알아가게 되면서 깊은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복음의 선포인 기독교의 설교도 원칙적으로 이야기의 특성(narrative quality)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 때문에 계몽주의 이후 인간의 이성에 우위를 두는 영향을 받아 기독교의 설교 역시 논증과 명제 중심의 설교의 형태를 가졌으나 1970년대 이후 현대 설교학에서 이야기의 특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들은 새로운 도전과 흐름으로 와 닿고 있다.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설교 방법은 하나의 방법론으로 자리를 잡아갈 뿐만 아니라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추세이다. 이야기를 통한 설교 방법이 여러 설교 방법들 중에서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라거나, 단지 가장 감화력을 주는 방법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최소한 설교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방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설교학에서의 이야기와 설교

이렇게 “설교의 전달”이라는 측면에 깊이 관심을 가져 온 현대 설교학은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사용의 중요성을 새롭게 발견하였다. 복음의 선포로서의 설교는 이야기로 되어 있으며, 성경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서 이야기를 사용하고 있음을 새롭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의 배후에 있는 초대교회의 설교(speech)가 어떠했는지를 추적하였던 윌더는 기독교 설교의 가장 기본적인 모드(the basic speech-mode of Christianity)는 이야기였으며*8, 이야기가 초대교회 생활과 증언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있는 곳, 어디에서든지 그들의 믿음을 고백할 수 있다. 그들의 성경이 없어도 이야기를 말함으로, 일련의 구원의 역사 가운데서 나타나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리할 수 있다. 하나님 말씀하시는 것도 이야기를 통해서이다. 하늘과 땅이 이야기 안으로 모아진다. 하나님은 역동적이고(active) 인간을 향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인간과 함께, 인간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는 좋은 이야기와 같이 시작이 있고, 중간이 있으며, 그리고 끝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단순히 비전과 환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꿈의 장면(dream shot)과 같은 것이 아니고, 순례이며, 힘들지만 끝까지 달려가야 하는 경기이며, 간단히 말해 역사(history)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기독교의 설교는 불가피하게 이야기의 형태를 가졌다*9.

이렇게 이야기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 이것은 어떤 점에서 기독교 설교의 기초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 논리와 명제 중심의 설교, 성경을 설명하는 해설식 설교, 설교의 개념을 전달하는 논증식 설교에서 이야기와 같이 흐름과 전개가 있는 설교의 틀을 발전시켰다. 특히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설교(preaching-as-storytelling)는 논리적이고 명제 중심적인 전통적 설교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등장한다. 전통적 설교는 교리를 중심으로 엮어지며, 명제를 중심으로 한 대지로 구분하여, 논리적이고 논증적인 설교의 형태를 가진다. 그 동안 설교는 주로 성경의 내용을 강해하고 설명해 주는 형태(an exposition of scripture)를 취하게 되었으며, 설교의 가장 두드러진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설교는 논리를 통해 성경의 교훈과 교리를 가르치고(teaching), 성경의 내용을 전수해 주는(transmitting)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설교에서는 이야기의 특성(narration)은 사라지고, 논리적인 사고(reflection)가 설교의 기본적인 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어떤 명제를 설명하고 예증하기 위한 예화(illustration)의 차원에 머무르게 된다.

설교에 있어 이야기의 중요성을 고려하도록 논의의 방향성을 제시해 준 사람은 그래디 데이비스(H. Grady Davis)였다. 그는 칼 바르트 이후 신정통주의 설교학에서 강조해 온 설교의 내용에 대한 강조로부터 이제 설교의 형식으로 설교학의 핵심적인 관심을 이동시킨 역할을 한다.

설교자들은 종종 복음서의 대부분이 등장인물, 장소, 사건, 그리고 대화 등으로 되어 있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 같다. 복음서는 어떤 일반적인 사상을 언어적으로 주해하고 설명해 주는 주석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설교의 9/10 정도는 언어적 주해나 논쟁으로 채워지고 있다. 사실 복음서에서 주해는 고작 1/10도 안 된다. 복음의 중심 내용은 주로 구연되는 이야기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10.

이러한 데이비스의 주장은 1960년대와 1970년대 북미의 설교학계에서 이야기의 설교와의 상호관계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하도록 촉발하였으며, 논리 중심의 논증적이고 명제 중심적인 설교 형태 - 계몽주의 영향과 함께 형성되어 지난 300년 동안 중심적으로 사용되던 설교의 틀인 - 로부터 설교의 새로운 형태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크게 공헌한 사람은 차알스 라이스(Charles Rice)와 프레드 크래독(Fred B. Craddock)이었다*11. 그들은 이야기와 설교에 대한 상호 연관성에 대한 연구를 불러일으켰으며,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발달, 문학 비평과 같은 새로운 성서연구방법론, 언어신학 이론(linguistic theory), 그리고 이야기신학(narrative theology)과 같은 주변의 연구들이 이러한 흐름의 토대로 작용한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설교의 패러다임은 북미의 설교학계에서는 가장 영향력 있고, 대중적인 흐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물론 많은 저자들에 의해 수많은 저작들이 쏟아지는데, 이야기와 설교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주장들은 각기 다르다고 할 만큼 다양한 형태와 관점들이 제시되지만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중요성을 함께 인식해 간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새로운 설교의 형태의 중심에는 이야기를 통한, 이야기와 같이, 이야기에 의한 설교의 형태를 개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설교의 형태는 획기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는데, 이러한 모든 설교 형태의 가장 기본적인 골격은 언제나 이야기에 있었다. 이제 설교를 “이야기를 말하는 것”(story-telling), 혹은 “이야기 나눔”(shared story)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통한 설교의 틀은 어느 한 가지라기보다는 커다란 우산과 같이 다양한 형태를 포괄하는 형태로 발전되어 간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설교는 현대 설교학에서는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지는데, 설교에서 실제로 하나의 이야기 혹은 몇 개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주장과 이야기와 같은 형태, 혹은 이야기의 형식을 따라서 설교를 구성할 것을 주장하는 관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설교의 틀이 제시되면서 가져온 긍정적인 공헌이 있다. 먼저 교회로 하여금 이야기에 관심을 유도하면서 결국은 성경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설교자는 대체적으로 주제설교를 거부하고 성경본문 자체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둘째로는 설교의 형태를 더욱 풍성하게 해 주었는데, 성경 본문의 형식을 중요하게 인식하게 되면서 다양한 설교 형식들을 추구하게 되었다. 셋째로는 성경이 어떤 영적 실체를 이론적으로 논증하려거나 설명하려고 하기보다는 그것을 서술하려는 특성(indicative character)을 가지고 있음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넷째로는 설교에 있어서 지성뿐만 아니라 이제는 감성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설교의 전반적인 특성이 새롭게 재편성되었다는 점이다. 논리적 논증 중심의 설교는 이제 지배적인 방법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 다섯째로는 설교의 언어에 내포된 시적이고 은유적인 측면이 부각되면서 설교에서의 상상력의 역할이 새롭게 강조되게 되었다*12.

이야기가 가지는 특성

이제 이야기를 통한 설교의 틀이 가지는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이야기가 가지는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특성을 잘 이해할 때 우리가 논의하려고 하는 서사설교에 대한 기본적인 틀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에는 언제나 그것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와 관련한 “내용”(content)이 있고, 어떤 내용을 전달하는지와 관련된 “형식”(form)이 있다. 서사비평(narrative criticism)에 대한 그의 책에서 막 포웰(Mark A. Powell)은 이야기(narrative)에는 그 이야기의 내용으로서의 “스토리”(story)와 그 이야기가 어떻게 말해지느냐에 대한 수사학적인 관점을 말하는 “담론”(discourse)으로 구분한다*13. 그에 따르면 하나의 스토리는 사건(events), 등장인물(characters), 배경(setting)이라는 요소들로 이루어지며 이 세 요소의 상호 작용을 플롯(plot)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담론은 그 스토리(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을 말하는데, 기본적인 사건, 등장인물, 그리고 배경이 동일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 엮어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주로 서사비평은 ‘담론되어진 것으로서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재된 독자(implied reader)로 하여금 이야기를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내재된 저자(implied author)가 어떤 방법을 사용하느냐를 묻는 것이다. 주로 서사비평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어떤 형식을 따라서 말해지는가와 어떤 특성을 갖는가와 관계된 몇 가지 내용을 설교와 관련하여 다루게 된다.

첫 번째 이야기는 “관점”(point of view)을 가진다. 관점은 서사비평이나 문학비평(literary criticism)에서 많이 사용되는 용어로, 이야기 전체를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한다. 서사비평에서는 내재된 저자가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한 가지 방법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야기의 관점과 일치하는 관점을 갖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그 이야기를 지배하는 “평가적 관점”(evaluative point of view)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것은 내재된 저자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 세운 규범이나 가치관, 그리고 세계관을 가리킨다. 이것은 “판단 기준”(standards of judgement)이 되며, 이것에 의해서 이야기의 사건, 등장인물, 그리고 이야기의 배경(setting)이 평가된다*14. 성경의 저자들은 언제나 모든 이야기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에 고정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야기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평가관점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그것이 규범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성경 저자들의 강력한 수사학적인 장치이다*15.

이렇게 이야기에는 의도된 관점이 있으며, 성경에 나타나는 이야기로 된 본문뿐만 아니라 모든 이야기는 말하는 사람의 관점을 내포한다. 이야기의 관점을 설교와 연결시켜 볼 때, 관점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본문을 해석하는 데에나 설교의 진행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것은 설교의 주제를 잡는 것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설교자가 본문의 관점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설교의 내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것은 설교의 진행 방향을 설정하고 장면을 전개해 가는데 필요한 요소이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7장의 수로보니게 여인이 딸의 치유를 위해 예수님께 간청하는 내용에서 설교자가 본문이 의도하는 관점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정하느냐에 따라 설교의 내용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우선 “유대인 우선 구원”이나 “선별적인 사랑”이라는 관점을 가질 수 있겠다. 다른 경우에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은혜받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 “믿음의 사람으로 서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인내” 등으로 관점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의 관점을 잡았다면 설교자는 본문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 즉 성경 본문의 관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관점을 바로 하지 못했을 때, 설교의 내용은 성경 본문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될 수도 있고, 알레고리나 영해의 수준에 머물 수 있다.

두 번째 이야기가 가지는 특징은 플롯(plot)이다. 모든 이야기는 플롯을 가진다. 그래서 혹자는 플롯은 이야기의 몸체(body)와 같다고 했다*16. 이것은 사건의 순서적이고 조직적인 배열을 결정짓는데, 상호 연관된 사건들의 의미 있는 연결고리이다. 이것은 이야기의 구조(structure)를 규정해 주는 원칙이며, 청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감정적인 이입이 가능하게 해 주는 방향으로 사건을 조직해 가도록 도와 준다. 이야기는 시작이 있고, 중간이 있으며, 끝이 있는 흐름 속에서 전개되어 간다. 이 흐름 혹은 움직임을 지배하는 것이 플롯이다. 여기에서 플롯은 단순한 흐름이 아니라 긴장상태, 혹은 문제 상황으로부터 그것의 해결(resolution)로 향해 움직인다. 유진 라우리는 플롯을 정의하기를 “불평형 상태(disequilibrium)로부터 해결 상황(resolution)으로 움직여 가는 이야기의 지속적인 긴장감(suspense)”이라고 했다*17.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극적인 반전(reversal)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의 비유를 연구하는 가운데 크로산은 이것을 “반전의 과격성”(radicality of reversal)이라고 했다. 단순한 전환이 아니라 “완전히 뒤집어 놓는 반전”(polar reversal)이기 때문이며, 북극이 남극이 되고, 남극이 북극이 되는 것과 같이 될 때를 그는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 것으로 표현한다*18.

설교에 있어서 플롯의 개념을 가장 잘 정리한 사람은 유진 라우리(Eugene Lowry)이다. 그는 설교를 “이야기와 같은 예술 형태”(narrative art form)로 이해하면서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event-in-time)이라고 정의한다*19). 이 말은 모든 설교는 연속성과 움직임을 가지고 결론을 향해 점점 진행되어 가는, 즉 플롯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설교는 어떤 주제의 해설을 담은 덩어리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이며 진행과정(process)이다. 시작과 마침이 있는 시간 속에서 흐름이며, 그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것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가 가지는 특성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을 주제로 한 드라마라면 “사랑이란 ……하는 것입니다”와 같은 명제를 두서너 개를 선정하여 그것을 논증하듯이 풀어가지 않는다. 컷과 컷이 연결되고, 사건과 사건이 연결되면서 처음 시작부터 움직임을 통해 스토리가 전개되어 간다. 이러한 이야기의 특성에서 플롯은 이야기의 구조뿐만 아니라 흐름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플롯은 시작에서 불평형 상태 제시, 보다 깊은 모호함이 제시됨, 클라이맥스를 향한 극적인 반전, 그리고 대단원을 향해 움직이는 것과 같은 단계를 거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그가 주장하는 설교 형태(narrative preaching)가 가지는 기본적인 골격이다.

세 번째 이야기가 가지는 특징은 움직임(movement)이다.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엮어 가면서 클라이맥스에 이르면서 끝나게 된다. 이야기란 이렇게 움직임을 갖는다. 이 사건에서 저 사건으로 지속적으로 진행해 가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야기는 언제나 질서 있게 움직여 가는 연속 장면(ordered sequence)으로 연결된다. 이야기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대화도 이러한 연속된 장면을 가진다. 설교에서 이러한 움직임이라는 이야기의 특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새로운 시도임에 틀림이 없다. 기본적으로 개념을 설명하고 논증하는 형식의 전통적인 설교가 정지된 화면처럼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면 이야기의 특성을 따라 움직임을 만들어 가는 설교는 정지된 화면이 아니라 움직임을 통해 발전해 가는 화면을 따라 설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론적인 내용은 전략적으로 연기되면서 설교는 연결되는 줄거리(sequence)를 통해 계속적으로 진행되어 가다 마지막 부분에서 “아하!”의 탄성이 터져 나올 수 있게 설교 구성을 꾀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라우리는 “결론의 전략적인 연기”(strategic delay)라고 주장한다*20. 이러한 움직임의 최종적인 목적은 “설교학적인 여행”을 청중들과 함께 해 가면서 말씀을 경험(experience)하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이와 같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를 드러내고,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에 있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는 중요한 자원이다. 수세기에 걸쳐 이야기는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생성(formation)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proclamation)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요소가 되어 왔음을 감안할 때 이야기를 통한 설교의 형태는 설교의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전통의 설교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하나의 장을 여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의 특성을 이해할 때 이야기를 통한 설교의 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야기가 갖는 특성과 같이 서사설교도 이러한 특성을 따라 전개된다.

서사설교 Ⅱ - 이야기를 통한 설교 방법

지난 호에서 우리는 왜 설교 가운데서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으며, 최근의 설교학에서는 설교를 “이야기를 말하는 것”(story-telling), 혹은 “이야기 나눔”(shared story)으로 이해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초대교회 이래 - 물론 계몽주의 이후 300년 동안은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어서 이야기의 상실의 시대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 복음을 말하는 것(gospel-telling)은 이야기를 말하는 것(story-telling)과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이야기의 회복은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21.

그 동안 설교자들은 “복음 그 자체가 대부분 사람들과 장소, 그리고 사건과 대화로 이루어진 단순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음을 자각하면서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중요성을 공감하게 되었다. 현대 설교학에서 이러한 흐름들은 단순히 새로운 설교 형태의 발견 정도가 아니었고,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강구하게 되었다. 즉 논리와 명제 중심의 논증적 설교 패러다임에서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는 설교 패러다임에로의 전환을 꾀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1970년대 이후 북미 설교학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논의되고 연구되면서 커다란 물줄기를 형성하게 되었고, 전혀 다른 설교의 틀과 형태를 제시하면서 활발한 설교학적인 논의와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이러한 전체적인 흐름을 리처드 에슬링거는 “새로운 설교학 운동”(the New Homiletics)이라고 명명하면서 이러한 일련의 설교학적인 연구들을 가리켜 “설교학의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과 같다고 평가한다*22. 이러한 설교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여러 갈래로 발전되어 왔으며, 이야기를 통한 설교의 한 형태인 서사 설교는 그 한가운데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이러한 설교의 흐름들이 한국교회 설교 강단에도 소개되면서 이야기를 통한 설교 방법들이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있음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 논의됨으로 혼란이 가중되거나, 그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여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기도 하고, 전혀 다른 형태를 만들어 가고 있는 아쉬움도 야기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설교의 새로운 형태인 서사 설교에 대한 설교 신학적인 이론들을 정립하고, 그 실제들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용어에 대한 정리와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설교 형태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현대 설교학에서 이야기를 통한 설교의 형태론적 구분

북미의 설교학계에서도 여러 학자들의 논의와 제시가 계속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간 것도 사실이지만 여기에는 다양한 논의만큼이나 혼동이 함께 산재되어 왔음이 사실이다. “이야기”(narrative)와 “설교”(preaching)라는 단어가 병렬 구조로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를 통한 설교의 형태는 하나의 형태보다는 다양한 형태로 제시되었다. 동일한 설교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발전되지만 이야기의 구조에 따른 설교 형태는 여러 줄기로 발전되어 왔다.

루이빌 신학 대학원의 설교학 교수인 존 맥클루어(John Mcclure)는 1990년대 초까지 논의된 경향들을 묶어 “이야기”(narrative)가 설교와 만났을 때 어떻게 역할하느냐에 따라 네 가지 경향으로 분류한다.

첫째로는 이야기의 해석학의 틀을 따른 형태(narrative hermeneutics)로, 설교에서 성경의 이야기의 측면이 설교의 형태와 내용을 결정짓는 형태이며, 둘째로는 이야기의 의미론(narrative semantics)과 관련된 것으로 설교의 형태를 플롯의 형태로 발전된 형태가 그것이다. 셋째로는 이야기의 문화화(narrative enculturation)와 관련된 형태로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 장르뿐만 아니라 상상력의 차원에 관심을 두는 형태이며,넷째로는 이야기의 세계관(narrative world view)에 따른 방법으로 교회가 신학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가지는 잠재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흐름을 말한다*23. 물론 맥클루어의 이해는 이야기와 실천의 장에서 만남의 중심으로 분류한 것이며, 어떤 것은 설교의 형태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부분도 포함시키고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논하게 되는 서사 설교의 형태는 주로 첫 번째와 두 번째 장르에 해당된다.

설교의 형태의 관점에서 볼 때,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설교 형태는 이야기 설교(story sermon)와 이야기식 설교(narrative preaching)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고 발전되었다. 전자는 주로 에드먼드 스타이믈(Edmund Steimle)과 그의 제자인 찰스 라이스(Charles Rice), 그리고 리처드 젠센 등의 설교 이론에서 발견되는 내용이다*24. 이들은 설교를 한편의 “제시된 이야기”(story told)로 이해한다. 성경의 이야기(The Story)와 현대적인 비유인 우리의 이야기(our stories)가 함께 엮어지면서 형성된다. 여기에서 설교는 본질적으로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형식들을 보게 되는데, 어떤 관원이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를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 주신다. 한편의 이야기 설교를 행하신 것이다. 다윗에게 행한 나단의 설교도 이러한 설교의 범주에 속하며,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들을 다시 이야기하면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한 사도행전의 스데반의 설교 역시 여기에 속한다. 전개의 형태에 있어서 이 설교는 등장인물(character), 배경(setting), 장면(state), 줄거리(plot) 등의 요소를 통해 구성된다는 점이 다른 설교와 다르다. 그러므로 이 설교에서는 설교자의 풍성한 상상력과 문학성을 통해 등장인물에 대한 심리적 묘사나 배경과 장면에 대한 상황적인 묘사가 적절히 주어진다면 더욱 효과적인 설교가 될 수 있다.

이야기식 설교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플롯(plot)을 통한 설교 구성으로 특징지어진다. 드라마나 단편소설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어떤 극적인 요소들, 즉 그 전개 과정에서 갈등과 긴장감을 제시하여 그것이 반전이라는 요소를 통해 해결되는 것과 같은 구조를 가지는 형태를 말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순 혹은 불일치(discrepancy)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이 심화되고, 극적인 전환을 통해 문제의 해결(resolution)로 이어지는 설교학적인 구성(homiletical plot)을 가진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마치 한편의 드라마나 수사극과 같이 앞부분에서 문제 제기 혹은 갈등 구조를 형성한 다음에 그 해답을 발견해 가는 발전 구조, 혹은 전개 구조를 가진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토마스 롱(Thomas G. Long)은 후자의 형태를 “문제 해결식 설교 방법”으로 명명한다*25. 이러한 설교 형태를 제시한 대표적인 학자로는 유진 라우리(Eugene L. Lowry)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시, 논쟁, 일화, 유머, 석의적 분석, 주석적 내용 등 풍부하고 다양한 자료들을 활용할 수 있고, “제시된 이야기”를 담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이야기와 같은 구조”(narrativelike)를 가진다.

이러한 두 설교 방법론을 서로를 포함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명확하게 구분 짓기는 쉽지 않지만, 광의적인 측면에서 볼 때, 후자가 전자의 범주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루시 로오즈는 이 두 방법론을 구분하기를 “이야기 설교는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을 통해 행해지는 설교라면, 이야기식 설교(narrative preaching)는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요소들을 통해 플롯의 구성을 가진 설교의 형태”라고 구분한다*26. 전자는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사건 혹은 장면(stage) 중심으로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라면, 후자는 보다 기계적인 구조 - 문제점 도출로부터 심화의 단계를 거쳐, 문제 해결의 단계로 나아가는 - 를 통해 설교가 구성되는 특징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설교의 구성에 있어서 설교자에게 설교 디자인에 대한 유연성 혹은 자유스러움을 부여하고 있다면, 후자의 경우에는 보다 엄격한 틀과 치밀한 구성을 고집한다.

서사 설교, 설교학 교육을 위한 구분

앞서 언급한 대로 이러한 경향들이 한국에 소개되거나 혹은 개발하여 사용되어 오는 가운데, 용어의 혼동뿐만 아니라 개념의 혼동이 있었다. 여기에는 다소의 과장도 있었고, 오해도 있었다. 특별히 80년대 후반부터 정장복은 장로회 신학대학교 설교학 교실에서 성경의 이야기를 다시 구성하여 들려 주는 방식(retelling)인 “설화체 설교” 방법론을 제시하여 설교학도들 사이에서는 나름대로의 정착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27. 이것은 설교의 문학성과 상황 묘사 등의 기재들을 사용하여 성경의 내러티브 본문에 대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평가되었고, 실험적으로 시도되면서 새로운 가능성도 보게 하였다.

그러나 북미 설교학계에서 발전된 이야기를 통한 설교의 틀과 설교 신학적인 제시들이 소개되면서 불가피하게 방법론과 그 용어 사용에 있어 혼동을 야기하게 되었다. 설교학도들에게 설교학을 교육하는 입장에서는 이에 대한 선명한 구분과 지침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혼동을 피하기 위해 우리의 현실에 맞는 새로운 설교 형태로 발전시키면서 그에 적합한 명칭이 필요하게 되었다. 형태적인 구분과 효과적인 설교학의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장신대에서 설교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을 중심으로 용어 사용상의 통일과 방법론적인 정비를 꾀하게 되었다. 즉 이러한 설교의 제반 형태를 포괄하여 “서사 설교”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그 하위 방법론으로 플롯의 형태를 통해 전개되는 설교 형태를 “설화체 설교”(plot method)로, 성경의 본문을 재구성하여 들려 주는 형태를 “이야기 설교”(retelling method)로 명명하게 되었다*28. 물론 이러한 구분에도 다소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말의 “서사”라는 용어나 “이야기”, “설화”라는 말이 같은 용어이며, 두 방법론에는 약간의 중복과 유사성이 존재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모든 이야기에는 그 구성이 기계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플롯은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혼동이 야기된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과 중복성은 문학 비평가이자 소설가인 포스터(E. M. Forster)가 플롯과 이야기의 차이점에 대해 제시한 내용에서 분명한 구분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이야기(story)를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배열된 사건들의 화술(narrative)로 정의해 왔다. 플롯(plot) 역시 사건들의 이야기이지만, 그 강조점이 인과 관계에 있다는 점이 다르다. “왕이 죽고, 이어서 그 여왕도 죽었다”라는 서술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왕이 죽었고, 슬픔을 이기지 못해 그 여왕도 죽었다”라는 서술은 플롯이다. 이야기는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대답한다. 반면에 플롯은 그 사건의 이유를 말해 준다*29.포스터가 설명한 ‘이야기’의 특성을 강하게 가진 구성이 리텔링의 방식이라면, 연계성과 연속성을 가진 구성이 플롯 방식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플롯을 중심으로 엮어지는 설교 형태

여기에서 우리는 두 방법론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필요로 한다. 이번 호에서는 먼저 이야기식(storylike)의 방식을 따르는 플롯 방식인 ‘설화체 설교’ 형태에 대해서 알아보자. 유진 라우리에 의해 주창된 이 설교의 방법론에서 설교는 주로 “이야기와 같은 예술 형태”(narrative art form)로 이해되며,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event-in-time)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자 설교학적인 아이디어는 플롯인데, 이것은 “설교학적인 묶음”(homiletical bind)의 역할을 하며, 이것은 이 설교 형태의 중요한 이미지가 된다. 이 설교 방법은 이야기식으로 구성된다는 설교학적인 플롯을 가짐으로써 한편의 커다란 이야기가 된다*30. 플롯을 가진다 함은 문제점 도출로부터 시작하여 심화의 단계를 거치며 문제 해결의 단계로 나아가는, 보다 기계적인 구조를 통해 설교가 구성되는 특징을 가진다. 단편소설에서와 같이 갈등(conflict)으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의 해결(resolution)로 흐르는 형태이며, 가려움을 제시하고 긁어 주기로 나아가는 형식을 취한다. 설교의 첫 부분에서 모순과 갈등이 제시되고, 그것이 훨씬 심화되고 복잡해지는 과정을 거쳐, 전혀 예기치 못했던 반전이 일어나며, 대단원의 종결이 이루어지는 형태를 가진다. 여기에서 모순점을 제시한다는 것은 딜레마를 형성하여 제시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라우리는 이것을 마음의 평정 상태를 흔들어 놓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의 방법론에서는 설교가 반드시 이야기로 되어져야 한다기보다는 “이야기와 같은”(story-like), 즉 “이야기체”(story-style)의 설교가 되게 하는 것이다.

플롯 방식의 설교를 작성함에 있어서 이러한 특징을 따라 “어떻게 설교를 구성할 것인가”가 중요한 사안이 된다. 본문을 선정하여 이러한 형식의 설교를 구상한다면 설교자는 앞서 언급한 대로 본문, 혹은 설교의 관점을 먼저 선정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모순점, 혹은 문제점을 제시하여 그 문제를 풀어 나갈 것인지를 구상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문제 제시뿐만 아니라 갈등의 심화와 반전의 단계까지를 염두에 둔 구상이 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플롯을 만들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인데, “아하 포인트”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라우리는 초기에 이러한 설교학적 플롯의 발전 단계를 다섯 단계로 제시한다*31. 이 다섯 단계를 좀더 상세하게 설명해 보자.

첫째는 평형을 깨뜨리는 단계이다. 설교자가 갈등을 유발시켜 문제를 제기하는 단계이다. 이것은 극작가, 드라마 작가, 소설가들이 잘 활용하는 접근 방식으로 처음 논의 혹은 이야기가 시작될 때 그들은 정신적 중립 상태에 있게 된다. 즉 어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도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냉담한 상태로 놓여 있기도 한다. 청중들은 중립 상태에서 관망한다. 그래서 주의와 집중, 참여를 이끌어 내는 데 있어 이 단계는 중요한 부분으로 꼽히게 된다. 설교에 있어서도 이 단계는 회중들의 관심을 유발하기 위한 단계이다. 설교를 듣고 있는 회중들이 가지고 있는 평형 상태를 깨뜨리는 것은 설교 시작의 열쇠가 된다.

둘째로는 모순 혹은 불일치를 분석하여 심화시키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첫째 단계에서 제기된 쟁점과 긴장 관계를 더 세심하게 분석하면서 더욱 심화시키는 방법을 가질 수 있다. 그러한 문제점 혹은 모순점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단계이다. 여기에서는 신학적인 근거도 제시될 수 있고, “왜”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면서 인간 실존의 상태까지 심층 분석하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분석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서술하는 것이 아니며, 예화로 대치되어서도 안 되며, 깊이 있는 진단이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설교자는 다음 단계에서 제시될 해결의 실마리를 생각하면서 그에 대한 준비로서 이 단계를 구상해야 한다. 이 단계를 통하여 모호함이 주는 긴박감, 즉 서스펜스가 형성되어지고 증대되어야 한다는 점을 설교자는 기억해야 한다. 라우리는 이 단계를 이러한 설교 구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하는데, 얼마나 복음을 강력하게 경험할 수 있느냐는 이 단계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단계가 적절하게 주어진다면 청중들은 “왜 그런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간절하게 기다리게 된다.

셋째로는 해결의 실마리를 보여 주는 반전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제기된 문제 혹은 모호함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복음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반전(reversal)이 일어나고, 단순하게 지적으로 아는 단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일어나는 단계가 되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청중들은 그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 도착하게 되는데, 모든 것이 뒤집어지면서 복음의 세계가 경험되는 것이다. 라우리의 표현에 의하면 이 단계는 “아하!”가 터져 나오는 단계이다.

넷째로는 복음을 경험하게 하는 단계이다. 해결의 실마리가 드러나면 이제 청중들은 복음을 경험할 준비가 된다. 앞의 모든 단계들은 사실 이 단계를 위해 존재한다. 모호함이 제기되고, 또 그 문제점들을 분석하면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복음이 보다 효과적으로 경험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라우리는 복음을 경험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타이밍을 잘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전 단계에서 모호함이 적절하게 제시되고, 또 문제의 실마리가 정확하게 제시된다면 복음은 명료하게 경험될 것이며, 청중들은 이 단계에서 다시 평정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다섯째로는 결과를 기대하는 단계이다. 지금까지 선포되는 설교를 통해서 청중들은 모순이 분석되었을 것이고, 해결의 실마리가 드러나면서 복음의 놀라운 소식을 경험한다. 이제 설교의 플롯에 있어서 모호함과 팽팽했던 긴장감은 이완되면서 마음의 해답을 얻는 기쁨이 있다. 이제 마지막 단계에서는 이렇게 주어진 복음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미래로 투사되면서 결론을 이루어 가는 단계이다. 경험한 복음을 중심으로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언급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최근의 책에서 4단계로 축소하여 소개하고 있다*32. 즉 갈등 혹은 모순점의 제시 단계(conflict), 갈등 혹은 모순점의 심화 단계(complication), 갑작스런 전환의 단계(sudden shift), 결론으로 들어올리는 단계(upholding) 등이 그것이다. 5단계가 4단계로 축소되지만 복음을 경험하게 하는 단계인 4단계를 다른 단계와 함께 주어지는 유동적인 단계로 이해하고 있다. 즉 4단계는 3단계와 함께 주어지기도 하고, 혹은 그 이후에도 주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라우리에 의하면 갑작스런 변환 그 자체가 복음의 소식이 되기도 하고, 설명을 통해서 놀라운 해결의 실마리가 풀려지면서, 즉 3단계(수정안), 갑작스런 전환의 단계 이후에 주어질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다섯 단계이든 네 단계이든 간에 그 기본 골격은 같지만 “복음 경험의 단계”에 유동성을 부여하여 기존의 3, 4단계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 것일 뿐이다.

정리하면 설화체 설교는 플롯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설교 형태로, 1) 갈등 혹은 문제 제기, 2) 갈등의 심화, 3) 반전, 4) 결론에로 들어올림과 같은 골격을 유지해 준비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예시를 통한 이해

라우리는 이러한 설교 형태의 예로서 가장 널리 인용되고 있는 설교문으로, “누가 더 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Who Could Ask for Anything More?)를 들 수 있다*33. 마태복음 20장 1절부터 16절을 본문으로 한 이 설교문은 듀크 대학교 채플에서 행해진 것이다. 플롯 방식 설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것을 단계적으로 분석해 보자.

1단계 평형을 깨드리는 단계에서는 성경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 주는 형태를 취하면서 성경 본문이 가지고 있는 상황 묘사를 통해 본문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모순점들을 제시한다. 투덜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은 포도원 주인과 분명히 동의한 일이지만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셨으면, 당연히 우리는 좀더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당연히 우리는 더 받을 것을 기대했습니다”라는 말과 “내 것으로 내가 준다”는 주인의 말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의 문제를 부각시킨다.

2단계 불일치를 분석하는 단계에서는 이러한 모순점들을 심화시킨다. 라우리는 이 단계를 그렇게 시작한다.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만약 우리가 아침 7시부터 진종일 일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그 때 우리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일한 시간이 다른데 어떻게 똑같이 월급을 줍니까? 그것은 공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 만약 당신이 시 교육위원회 위원으로서 새로운 교사를 채용하려고 할 때, 지원자 중 선정된 두 사람이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거의 동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남자고, 한 사람은 여자입니다. …… 여자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남자보다 월급을 덜 지급한다고 합시다. 당신은 바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연히 해고되어야 할 것입니다. …… 만약 당신이 정원 일을 맡기기 위해서 일꾼 몇 사람을 구한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백인이고, 한 사람은 흑인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게 돈을 적게 지불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라우리의 분석과 진단은 오늘의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을 열거하면서 그것이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계속해서 부각시킨다. 아마도 주인이 방법이 옳다고 하더라도 내일 아침 7시에 시장에 가서 사람을 찾는다면 그 시간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고, 아마 오후 5시 15분 전에 사람을 찾으러 가는 시간에 맞추어 몰려들 것이고, 오직 한 시간만 일하고 같은 임금을 받으려고 할 것이라고 그 모순점을 아주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3단계,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제시하는 단계에서는 본문의 앞장에 나오는 부자 관원의 이야기와 연결시켜 가면서 베드로가 했던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럼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얻겠습니까?”라는 질문을 언급하면서 주님의 대답은 무엇을 얻을 것인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나를 쫓고 있다면 너는 속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비즈니스 거래가 아니고, 계약(contract)을 체결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때문에 일하게 되는 것임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여기에서 4단계 복음을 경험하는 단계로 곧바로 이어진다. 이 단계를 다음의 예로 바로 연결된다.

이제 여러분이 3살, 6살, 9살 먹은 세 자녀를 둔 부모라고 상상해 보십시다. 여러분은 세 살 먹은 아이보다 9살 먹은 아이를 세 배나 더 사랑하십니까? 물론 9살 먹은 큰 아이는 나이를 세 배나 더 먹었고, 가장 오랜 시간 부모를 많이 도와 주었다는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아니 당신이 9살 먹은 아이라면, 당신은 세 살 때 했던 것보다 부모님을 세 배나 더 사랑하십니까? “아니,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한 가족인 걸요?” 그렇습니다. 이것은 한 가족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5단계, 결론을 기대하는 단계에서는 지금도 하나님은 포도원에 사람들을 들이기를 원하고 계시며, “포도원에 초청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본향에 청함받은 것입니다. 누가 더 달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는 말로 그의 설교의 결론을 맺고 있다.

설교의 여정을 함께 가게 하는 방법

이 방법론에서 요구되는 것은 소설가와 같은 구성 능력이 필요하고, 기본 골격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모순점을 만들고, 그것을 심화시키는 것이 언제나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설교에서 다루려는 가장 기본적인 쟁점(issue)이 무엇인지를 중심으로부터 생각하고 출발한다면 본문을 중심으로 문제 제기를 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편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런 모순점 제시가 없이 전개된다면 누가 그것을 끝까지 시청할 것인가? 손에 땀을 쥐게 하고, 화면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드라마에 빠져드는 것은 이러한 문제 제기와 갈등의 심화, 그리고 반전으로 이어지는 플롯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방법을 따라 설교가 준비될 때, 이것이 가지는 이점은 여러 가지이겠으나 무엇보다도 청중들의 기대를 끌 수 있다는 장점과 설교가 지향하는 목표를 향해 설교자와 청중이 함께 설교의 여정(homiletical journey)을 가질 수 있으며, 엠마오 도상에서와 같이 가슴이 뜨거워지는 말씀 경험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는 설교 방법 중의 하나이다.

서사설교 Ⅲ - 이야기를 통한 설교 방법

한 이야기 설교자

오래 전 한 설교자가 참으로 두렵고 어려운 설교 부탁을 받았다. 그 동안 믿음 생활을 잘 하였던 왕이었지만 강성한 제국을 이루자 절대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왕은 최근에 간음과 살인을 서슴지 않고 범하기 때문에, 설교자는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그를 바로 세우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의 잘못을 지적한다는 것은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며, 생명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왕이 행한 불의는 신문 지상에만 보도되지 않았지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서 늘 눈치보기에 익숙해 있던 검찰청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백성들에게는 엄격하던 법의 잣대도 절대 권력자 앞에서는 꺾여 있었다. 절대 권력에게 누가 감히 대항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실로 생명을 걸어야 할 위험한 일이었기에 쉽게 나설 일은 아니었다. 그러한 때에 그 설교자는 왕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청와대 조찬 기도회에 설교하러 가는 것과 같은 자랑스런 걸음이 아니었고, 어쩌면 모든 것과의 이별을 고하고 가서 생명을 걸고 말씀을 전해야 할 그런 걸음이었다.

깊은 기도와 말씀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설교 준비가 끝난 설교자는 이제 왕궁으로 출발한다. 설교자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만을 올곧게 선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다시 새롭게 하면서 집을 나섰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비장한 각오를 해 보지만 그것은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다. 이제는 성경을 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된다.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까? 율법서의 말씀을 펴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엄격한 법을 설명해 가면서 그의 잘못을 지적할까? 역사서를 펼쳐서 과거의 역사 속에서 왕들에게 주셨던 교훈을 말함으로 그로 하여금 돌이키게 할까? 아니면 하나님의 종이라는 설교자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그의 잘못을 바로 지적하여 회개하도록 정면 돌파의 방법을 사용할까?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이니 설교 준비할 때부터 설교를 어떻게 구성할까 깊이 고심하였지만 막상 설교를 전달하려고 하니 아직도 그 고민은 끝이 나지 않았다. 망설이던 설교자는 그의 설교를 그렇게 시작한다.

한 동네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양도 많고 소도 많이 가진 부자였지만, 한 사람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인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가난한 사람은 자식이 없었던 터라 그 양을 마치 자식처럼 키웠습니다.

그렇게 그의 설교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 설교자는 이야기의 형식을 따라 첫 장면을 펼친다. 감사하게도 유일한 청중이었던 왕은 그의 설교에 깊이 빨려 들어온다. 두 번째 장면이 펼쳐지는 때에는 벌써 그 이야기 속으로 함께 동화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평온하던 그 곳에 한 사람의 탐욕으로 인해 평화가 깨지고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하는 내용이 계속되어 두 번째 장면으로 전개된다. 부자의 집에 친구가 방문했을 때 손님을 접대한다고 딸자식같이 여기던 가난한 사람의 양을 잡아간 장면을 묘사해 갈 때는 설교자의 가슴에도, 청중들의 가슴에도 안타까움과 분노가 함께 교차된다. 세 번째 장면으로 나아가기도 전에 왕은 분노로 가득하여 소리친다.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놈은 죽어 마땅하다.” 설교의 여정 가운데 직접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소위 설교의 여정에 강력한 참여(participation)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설교자는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외치면서 왕의 죄를 지적한다. 실로 목을 내걸고 외치는 메시지였기에 쉽지 않았으나 거기에서 멈출 수는 없었다. 말씀에 압도된 왕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무서운 심판의 말씀도 모두 그대로 수용해 들이고 있었다.

이것은 선지자 나단이 죄를 범한 다윗 왕에게 나아가 설교한 장면인데, 특별히 이야기의 힘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 준다. 나단은 죄의 문제나 심판에 관한 ‘교리’를 전하지 않았다. 왜 회개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증의 형식을 취한 것도 아니다. 그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설교 가운데 이야기의 특성을 잘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전해야 할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했을 뿐만 아니라 죄악 가운데 있는 사람을 되돌이켜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울 수 있었다. 왜냐 하면 “이야기는 성경 본문의 세계를 가장 선명하게 듣게 하고 그것을 재창조해 주는 주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낯설고 경이로운 풍경과 이야기의 세계의 사람들과 만남을 갖게 하며 그들과 동일시를 경험”하게 해 준다. 결국 이야기는 “우리가 누구이며, 누구의 것이며,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선명하게 알려 주는 거룩한 만남”*34이기 때문에 설교에 강력한 힘을 가져오는 요소가 된다.

지난 호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통한 설교 방법에 있어서 형태론적인 구분을 시도하면서*35, 플롯을 중심으로 엮어지는 설교 형태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서사 설교의 형태 중에서 성경의 본문을 재구성하여 들려 주는 형태에 대해서 알아보고, 또한 전반적으로 서사 설교의 작성과 전달 시에 유의해야 할 사항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재구성하여 들려 주는 방법(Retelling Method)

재구성하여 들려 주는 형식을 따르는 이야기 설교는 석의적 작업을 통해 드러난 전하려는 설교의 중심 메시지를 설교자의 상상력이나 현대적 기법을 따라 본문을 재구성하여 들려 주는 설교 방식이다. 여기에서 전체적인 설교의 구성은 주로 전하려는 설교의 중심 메시지를 처음부터 제시하지 않고 집약적으로 보류하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나게 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것은 마치 조각가가 커다란 돌덩이를 깨뜨리면서 작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비견될 수 있는데, 설교자도 조각가와 같이 서서히 그의 회중들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드러나게 하는 구도를 가지고 전개해 나간다. 여기에서는 반드시 모순점을 제시하고, 그것을 심화시키다가 반전을 거쳐 모순점을 해결(resolution)해 나가는 플롯의 구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물론 여기에도 이야기가 가지는 기본적인 특성인 플롯이 지배할 수는 있으나 반드시 모순점의 해결이라는 구도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플롯을 통한 방법인 설화체 설교와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설교 역시 진행과 내용의 발전적인 전개(movement)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주로 발전과 전개를 이루어 가는 기본 단위를 편의상 장면(stage)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장면’이라 함은 설교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서 마치 드라마에서 1막, 2막으로 제시되는 부분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것은 독립적으로 위치하지 않고 함께 연결고리를 가지고 결론을 향하여 진행, 발전되어 가는 과정 속에 위치하는 설교의 한 파트의 역할을 한다. 장면들은 이야기 본문이 가지는 기본 구성 요소들을 중심으로 구성될 수도 있고, 설교의 관점에 따라 시간적인 순서를 재배치할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움직임’을 전제로 하면서 ‘연속성’과 ‘상호 연결성’을 고려하여 장면들을 형성해 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 설교 형태는 그 구성에 있어서 보다 유연성(flexibility)과 자유스러움, 그리고 창의성을 가지고 구성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설교자는 성경 본문의 구성과 배열을 따라 “장면”을 연결해 만들 수도 있고, 성경 외의 에피소드를 묶어 가면서 장면을 엮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에피소드로 엮는다 함은 반드시 본문의 구성이나 스토리 전개를 중심으로 장면이 구성되지 않고, 성경의 이야기와 오늘의 이야기(설교자의 이야기, 회중의 이야기, 현재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 등)를 함께 엮어 가는 형태를 취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설교의 형태는 재구성하여 다시 들려 주는 형태(retelling)를 취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현대적인 삽화(episode)를 통해서도 장면을 구성할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 가령 요한 복음 20장에 무덤을 찾아가는 막달라 마리아의 스토리를 중심으로 설교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의 이야기를 첫 번째 장면으로 잡아 현대적인 사건이나 경험을 삽화로 제시하고, 두 번째 장면에서는 예수님을 잃은 슬픔 가운데 있는 마리아의 아픔과 절망을 묘사할 수 있겠다. 이렇게 성경의 자료와 성경 외적인 자료들을 함께 엮어 가는 데는 이 방법이 보다 효과적이다. 이것은 단순히 성경 본문이 제시하는 쟁점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의 쟁점들과도 연결을 시도하며, 씨름하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서사 설교에 있어서 장면은 무엇보다도 청중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말씀 탐험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청중들의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에 도움을 준다. 장면이 진행되는 동안, 적어도 그들이 함께 그 장면의 움직임을 따라 설교의 여정을 함께 가질 수 있다면 그들은 그들의 의식 속에 시작부터 마지막 아하가 터져 나올 때까지, 그리고 스스로 결단하며 예배당을 떠나기까지 그들 속에 말씀을 통한 의식의 흐름이 형성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장면을 설정할 때 설교자는 먼저 그 설교에서 전하게 될 핵심 메시지를 주제로 설정해야 하며, 그것을 각 장면들을 지배하는, 다시 말해 관통하는 내용이 되어야 한다. 그 주제는 성경 본문 가운데서 선정되어야 할 것이며, 설교자가 전하려는 내용보다는 본문의 진지한 석의 작업을 통해서 제시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주제는 본문이 제시하려고 하는 진정한 쟁점(issue)을 의미하기도 하고, 중심 메시지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정해진 주제는 각 장면의 내용뿐만 아니라 배열까지 지배한다. 즉 아무 내용이나 무작위로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제를 드러내는 포인트(aha-point)를 집약적으로 연기하면서 그것을 향한 전개 혹은 발전되어 가는 움직임의 구조를 따라 장면이 세워져야 한다. 이러한 통일성을 위해서 각 장면은 다루는 내용을 일관되게 하는 일정한 관점(point of view)을 따라 전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장면은 다각도로 조명하기보다는 일정한 초점(focus)을 따라 조명해 가는 것이 좋겠다. 각 장면을 전개해 나갈 때 다초점(multi-focus)을 통해 조명하기보다는 한 가지 명확한 관점을 가지고 설명하고 묘사해 가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단일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해 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여러 주제들을 산만하게 제시하는 방식보다는 단일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해 가는 것이 메시지의 선명성을 가져다 줄 수 있으며,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선정한 어떤 본문은 여러 가지 주제들을 포함할 수 있지만 모두를 다루려고 하기보다는 한 설교에서 한 주제만을 다루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 대한 본문(눅 24장)을 가지고 이야기 설교로 준비한다고 하자. 본문을 연구하던 설교자는 본문의 핵심적인 메시지로서 “눈이 열린 제자들”, “동행하시는 주님”, 혹은 “믿음의 회복” 등과 같은 주제를 찾을 수 있었다. 설교의 명확성을 위해서 설교자는 이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정하여 그 주제가 각 장면들을 지배해 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첫 번째 장면으로 상상력을 활용하여 엠마오로 내려가기 전 제자들의 방황을 묘사함으로써 장면을 꾸민다. 그리고 두 번째 장면에서는 엠마오 도상에서 미지의 동행자와 나누는 대화의 장면을, 세 번째 장면에서는 엠마오에 이르러 함께 식사하는 장면을, 마지막 장면에서는 밤중에 들뜬 가슴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설교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서사 설교 준비를 위한 고려 사항

서사 설교는 기존에 사용하던 설교 형태와는 상당히 다른 방법이기 때문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사실 서사 설교는 커다란 장점과 유용성을 가진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설교자의 깊은 연구와 설교 구성을 위한 창의력을 통한 노력을 요구한다. 이 설교를 보다 효과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몇 가지 고려 사항이 있다. 여기에서 제시되는 사항들은 원칙이라기보다는 설교 준비를 보다 수월하게 하는 지침이요, 길라잡이와 같은 내용들이다. 여기에서는 설교 준비와 관련하여 설교자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이해와 관련된 몇 가지 항목만을 언급하려고 한다.

첫째는 본문 선정과 연구에 대한 것이다. 서사 설교라고 해서 본문 선정이 다른 설교 형식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비교적 비유로 된 본문이나 내러티브 본문을 설교하는데 특히 유용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설교자의 상상력과 문학적인 기교가 적절히 활용된다면 반드시 비유나 이야기로 된 본문에 국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서사 설교는 내러티브 본문뿐만 아니라 일반 본문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설교를 작성할 수 있는 방법이다. 또한 서사 설교를 하면 반드시 성경의 인물만을 다루는 설교 정도로 생각하는데, 이것도 오해이다. 다만 성경에 인물을 중심으로 한 사건과 내러티브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인물을 중심으로 한 설교가 많이 행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설교한다면 그의 일대기를 다룰 수도 있겠고, 한두 본문을 연결하여 특별한 사건을 중심으로 그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방법도 있겠지만, 설교의 내용이 너무 광범위해질 수 있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사건이나 인물을 다루는 설교에서 여러 본문을 사용하는 것은 설교자의 결정에 따라야 하지만, 너무 많은 내용을 다루면 산만해질 수도 있고, 연결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약점이 있다.

본문을 대하는 이야기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본문이 말씀하는 바를 먼저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들을 수 없는 사람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을 정한 후에 설교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본문이 말씀하는 것에 대해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어떤 설교 형태를 통해 설교하든 비슷하겠지만 특별히 이야기 설교자는 먼저 가능한 설교 자료를 발굴하려고 하기 전에 “단순히 본문으로부터 듣는 것”이 필요하다. 성서 기자들이 보았던 것을 보아야 하며, 그들이 느꼈던 것을 느끼며, 그들이 들었던 것을 들으려는 자세를 가지고 말씀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며, 그들의 입장이 되어서 함께 서 보면서 그들의 자리로 함께 파고들어야 한다.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 사건과 사람들을 관찰하여야 하며, 그들에게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본문에서 제시되는 말씀과 이야기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 때, 서사 설교는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적용에 관해서 알아보자. 설교에 있어서 적용은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고대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청중들의 삶에 해석하고 들려 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적용이지만 설교에 있어서 적용은 말씀을 개인화시키는 소중한 작업이다. 왜냐 하면 적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현장(context)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야기는 직접적인 적용보다는 간접적인 적용의 형태를 따른다. 그래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서사 설교도 자칫하면 적용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있다. 그와는 반대로 너무 직접적인 적용을 시도함으로 서사 설교의 특성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다른 설교 형태에 비해서 서사 설교는 적용이 약해질 수 있는 설교 형태이다. 그러면서도 너무 직접적인 적용이 제시될 때 오히려 그 효과가 떨어질 수 있는 양면성을 가진 방법론이다.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말하지 않지만 그 이야기 자체가 말하는 특징을 가진다.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성경의 세계로 들어갔다가 다시 우리 현실로 나올 수 있는 상상의 통로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이 상상의 통로를 열어 놓고 청중들을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세계를 통해 오늘의 세계를 볼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는 책임을 가진다. 어떤 면에서는 서사 설교의 효시적인 형태인 귀납적 설교에서는 직접적인 적용이나 명령을 제시하기보다는 청중들이 단순히 이야기를 들음으로 해서 스스로 결단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결론의 개방성”(open-endedness)과 “간접적인 적용”(indirectness)을 강조한다((이러한 경향에 대해서는 Fred B. Craddock, Overhearing the Gospel (Nashville: Abingdon Press, 1978)을 참조하라.)).

그러나 한국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일반적으로 서사 설교에 있어서 두 가지 형태의 적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설교의 중간 중간에 한두 문장으로 간단하게 적용을 시도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마지막 단계 혹은 장면에서 청중들을 결론으로 이끌어 올리는(upholding)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청중들의 삶을 터치함으로써 결단하게 만들고, 주시는 말씀에 온전히 젖어들 수 있도록 하는 형태이다. 어떤 형태의 적용 방법을 택하든 서사 설교에서는 적용 문제가 너무 직접적으로 되지 않도록 하면서도 말씀의 현장화를 놓치지 않는 형태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서사 설교에서 적용과 관련하여 설교자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은 설교 준비의 첫 번째 단계에서 성경으로부터 들으려고 했던 것과 같이 청중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해야 한다. 방황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절망하는 청중의 삶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기뻐하고 감격하는 그들의 생의 이야기를 함께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방랑자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박탈당한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한다. “사람은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들은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가 사람들의 절망과 기다림에 대해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말씀의 적용이 가능해질 것이다.

세 번째는 언어 사용에 관한 것이다. 설교에서 어떠한 설교 언어가 사용되느냐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언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것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도록 도와 주는 가장 직접적인 매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는 설교에 있어서도 “존재의 집”과 같이 작용하며, 또한 그것을 확대해 주는 역할을 감당한다. 서사 설교에서 어떤 언어가 사용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일반적인 설교에서 언어는 어떤 개념을 설명하고, 어떤 사실을 논증하며, 교훈하는 “편리한 코드”*36 정도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서사 설교에서는 청중들에게 듣게 하고, 보게 하며, 맛보게 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전통적인 설교는 강의식 양식의 언어를 선호하는데, 교리와 관념, 그리고 그에 대한 정의하는 언어를 선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명령적이고, 교훈적인 언어(imperative language)보다는 서술적이고 사실적인 언어(indicative language) 형태를 즐겨 사용한다. 그러므로 시적이고, 문학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또한 이야기가 가지는 상상력이나 이미지, 혹은 메타포 등을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사 설교자들이 삼가 조심해야 할 것은 너무 산란한 문학적 기교나 심미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설교가 언어의 유희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서사 설교에서 문학적인 표현이나 묘사를 많이 사용하다 보면 구어체가 되기보다는 상당히 문어체적 설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현실 세계와는 동떨어진 언어 표현들이 많이 사용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야기는 기교를 통해서 보다는 삶의 주변에서 쉽게 대할 수 있는 일상의 이야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

넷째로는 설교 구성에 관한 사항이다. 서사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성이다. 설교자는 본문의 특성,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에 따라서 설교의 구성 방법을 결정해야 한다. 즉 설화체 설교로 할 것인지, 혹은 이야기 설교로 할 것인지 먼저 그 전개 방법을 선정하여야 한다. 본문이나 메시지의 내용에서 모순점, 혹은 갈등 구조를 만들 수 있고, 그것을 해결해 가는 방식으로 설교를 구성할 수 있다면 설화체 설교의 구성 방법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건이나 에피소드를 이어가면서 설교 내용을 엮어 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된다면 이야기 설교 구성을 따르면 된다.

서사 설교를 구성함에 있어서 한두 가지 오해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서사 설교는 반드시 성경의 본문을 다시 들려 주는(retelling) 형식만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사 설교라고 해서 반드시 성경의 스토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거나, 성경의 사건만을 진술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의 스토리를 통해서 오늘의 상황을 조명하며, 청중들의 삶의 경험을 통해서 성경의 스토리를 해석해 나가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그러므로 서사 설교에서는 성경의 이야기와 설교자의 이야기, 청중들의 이야기가 함께 엮어지면서 전개된다. 결국 두 세계를 오가며 이루어지는데, 성경의 이야기(The Story)와 공유하는 개인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이야기(our stories)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서사 설교는 다른 설교와 마찬가지로 성경과 삶의 상황 사이를 오가면서(ferrying)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또한 구성은 자연스럽게 연역적인 방식보다는 귀납적인 방식을 따른다. 앞서 언급한 대로 설교의 관점과 주제는 전략적으로 연기되며, 점점 그 개념이 발전적으로 제시되면서 “아하”가 터져 나오도록 하는 구성을 해야 한다. 연역적인 방법은 진리, 복음, 혹은 설교의 요점이 설교의 첫 부분에서 제시된다면 서사 설교는 전개 형식에 있어서는 귀납적인 접근을 따르기 때문에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발견되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다섯 번째는 청중 이해에 관한 사항이다. 전통적인 설교에서 청중들은 언제나 설교자보다 열등하며, 낮은 자리에서 말씀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구조는 언제나 권위적이다. 설교의 결론이 설교의 발전 과정보다 앞서 제시되는 전통적인 설교 형태에서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제하면서 출발한다.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설교자 앞에서 청중들은 보내 주는 메시지를 받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관계를 잘 묘사해 주는 메타포가 “수도관”과 “야단치는 화난 부모”이다. 청중은 위에서부터 수도관을 통해 흘러내는 물을 그저 받기만 하면 되는 수동적인 존재이다. 즉 설교자가 투수라면 청중은 포수(catcher)로 이해하는 관계 구도를 설정한다. 반면 설교자는 권위자이며,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존재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로빈슨이 풍자적으로 말한 대로 설교자는 마치 “장난꾸러기 아이들을 혼내는 무서운 부모”*37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서사 설교에서 청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찾아 여행을 떠나는 동반자이다. 청중은 설교자와 함께 말씀을 찾아 떠나며, 또 함께 말씀을 발견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청중들을 말씀의 여행에로 초청해야 하며, 설교의 모든 흐름은 권위적(authoritarian)인 것이 아니라 말씀의 푸른 초장으로 함께 나서도록 청중들을 인도하는 초청적(invitational)인 것이어야 한다.

이야기를 통한 설교의 가능성을 보면서

토마스 롱이 설교는 “아주 넓고 깊은 강”이라고 표현한 것처럼*38 서사 설교의 장 역시 폭넓고 거대한 강줄기와 같다. 이 말은 서사 설교는 단 시간에 이룩되는 작업이 아니며,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연구해야 할 분야라는 말이다. 신학에서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 가면서 소위 “이야기를 통한 설교”에 대한 관심은 크지만 “어떻게”에 부딪히면 혼동과 이에 대한 두려움, 혹은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에서는 서사 설교에 대한 한 이해를 정리하려고 했다. 서사 설교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아직도 이러한 논의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논리 중심의 설교에 식상해 있는 한국교회의 청중들에게는 “이야기를 통한 설교”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야기의 유용성이 크듯이 이야기를 통한 설교의 유용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무엇보다도 이야기는 성경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며, 복음을 선포하는 단순히 하나의 방법이 아니라 “표준적인 방법”이었다. 복음은 본질적으로 그 형태에 있어서 이야기이며 그 복음에 대한 교회의 믿음의 표현도 이야기를 통해서 주어졌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과 성경의 기자들, 그리고 많은 설교자들이 이야기를 사용하였으며, 그들에게 있어서 이야기는 일시적인 수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형태임을 믿기 때문이다*39. 마이클 윌리엄스는 설교를 이야기 나눔의 틀을 통해서 생각하면서 그 효용성을 그렇게 밝히고 있다.

이야기는 신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여러 설교의 테크닉 가운데 하나는 아니다. 이야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야기가 철학적 명제들을 매끄럽게 처리해 주거나 설교의 대지를 잘 예증해 주는 방법이어서가 아니다. 이야기는 낯설고 경이로운 세계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이며, 다른 사람들의 존재의 언어를 통해 드러나며 상상력을 통해 함께 나누는 그 이야기가 보여 주는 세계의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다. 결국 이야기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누구의 것이며 어디에 속해 있는지 우리의 정체성에 선명하게 말해 주는 거룩한 만남(sacred encounter)이다. 그러나 이야기에는 그 이상의 것도 있는데, 이야기는 신비의 최전방(the very frontier of mystery)으로 우리들을 이끌어 가는데, 사람들과 세계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가장 앞선 접점이다. 우리가 어두움과 침묵을 주시하고 있는 동안 이야기는 우리를 사로잡는다*40.

이러한 이야기의 유용성 때문에 이야기를 통한 설교 방법은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여기에서는 그 필요성과 간략한 지침만을 제시했으나 남은 모든 것은 언제나 설교자의 몫이다. 설교 교육이라는 차원에서 서사 설교의 두 가지 장르에 대해서 논의했지만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설교는 수많은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논의의 문을 열어 두고자 한다. 그러나 이야기를 통한 설교 방법을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정도로 생각하는 것도 위험하다. 누구든 유리구두를 신기만 하면 왕자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세계의 다양성을 제한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형식의 설교와 마찬가지로 책임 있게 사용될 수 있고, 무책임하게 사용될 수도 있다. 여기서 “책임 있게”라 함은 되는 대로가 아니라 분명한 원칙과 마땅히 습득해야 할 것들을 습득하기 위한 설교자의 열심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데도 익숙한 방법에 비해 시간이 더 많이 들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한다면 그는 “무책임한” 설교자가 될 것이다.


*1 John Dominic Crossan, The Dark Interval: Towards a Theology of Story(Sonoma: Polebridge Press, 1988), 31.
*2 Amos N. Wilder, Early Christian Rhetoric: The Language of the Gospel(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4), 71.
*3 Fred B. Craddock, Overhearing the Gospel: Preaching and Teaching the Faith to Persons who Have Heard It All Before(Nashville: Abingdon Press, 1978), 139.
*4 Thomas E. Boomershine, Story Journey: An Invitation to the Gospel as Storytelling(Nashville: Abingdon Press, 1988), 21.
*5 Wayne B. Robinson, “Introduction” in Journeys toward Narrative Preaching, ed. Wayne B. Robinson(New York: The Pilgrim Press, 1990), 3. (이 책은 한국장로교출판사에서 『이야기식 설교를 향한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6 이야기와 계시의 상관성에 대해서는 H. Richard Niebuhr, The Meaning of Revelation(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 1941), 특히 2, 3장; George W. Stroup, The Promise of Narrative Theology: Recovering the Gospel in the Church(Atlanta: John Knox Press, 1981)를 참조하라.
*7 Boomershine, Story Journey, 18.
*8 Wilder, Early Christian Rhetoric, 29-30.
*9 같은 책, 56-57.
*10 H. Grady Davis, Design for Preaching(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58), 157.
*11 라이스와 크래독은 다음의 책들을 발간하여 이러한 탐구의 여정을 시작하게 했다. Charles Rice, Interpretation and Imagination: The Preacher and Contemporary Literature(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0); Fred B. Craddock, As One without Authority, revised and enlarged ed.(St. Louis: Chalice Press, 2001).
*12 Charles L. Campbell, Preaching Jesus: New Directions for Homiletics in Hans Frei’s Postliberal Theology(Grand Rapids: Eerdmans, 1997).
*13 Mark A. Powell, What Is Narrative Criticism?(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0), 23.
*14 같은 책, 24.
*15 같은 책, 25.
*16 Shimon Bar-Efrat, Narrative Art in the Bible(Sheffield: Almond Press, 1989), 93.
*17 Eugene Lowry, Doing Time in the Pulpit: The Relationship between Narrative and Preaching(Nashville: Abingdon Press, 1985), 52.
*18 John Dominic Crossan, In Parable: The Challenge of the Historical Jesus(New York: Harper, 1973).
*19 Eugene Lowry, The Homiletical Plot: The Sermon as Narrative Art Form(Atlanta: John Knox Press, 1980), 6. (이 책은 한국장로교출판사에서 『이야기식 설교 구성』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20 Eugene L. Lowry, The Sermon: Dancing the Edge of Mystery(Nashville: Abingdon Press, 1997), 24.
*21 Amos N. Wilder, Early Christian Rhetoric: The Language of the Gospel(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4), 43.
*22 Richard Eslinger, A New Hearing: Living Options in Homiletic Method(Nashville: Abingdon Press, 1987), 11-14, 65.
*23 John S. McClure, “Narrative and Preaching: Sorting It All out”, Journal for Preachers(Advent 1991): 24-28.
*24 Edmund A. Steimle, Morris J. Niedenthal, and Charles L. Rice, Preaching the Story(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0); Charles Rice, “Preachers as Storyteller”, Union Seminary Quarterly Review, vol. 31, no. 3(Spring 1976): 193-196; Richard A. Jensen, Telling the Story(Minneapolis: Augsburg Publishing Co., 1980); Thinking in Story(Lima: CSS Publishing Co., 1993).
*25 Thomas G. Long, The Witness of Preaching, 정장복, 김운용 역, 『증언으로서의 설교』 (서울: 쿰란출판사, 1996), 204.
*26 Lucy A. Rose, Sharing the Word: Preaching in the Roundtable Church(Louisville: WJK, 1996), 75.
*27 정장복, 『설교학 서설』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7), 151-153을 보라.
*28 보다 자세한 설명과 이론적 고찰에 대해서는 정장복, 주승중, 김수중, 김운용, 『새천년 성경적 설교: 서사 설교의 실제1』 (서울: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2000); 정장복, 주승중, 김운용, 『새천년 성경적 설교: 서사 설교의 실제2』 (서울: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2002)를 참조하라.
*29 E. M. Foster, Aspects of the Novel(Harmondsworth, Eng.: Penquin Books, 1962, reprint), 93-95; Robert G. Hughes, “Narrative as Plot”, in Journeys toward Narrative Preaching, ed. Wayne Bradley Robinson(New York: The Pilgrim Press, 1990), 57쪽에서 재인용.
*30 여기에서 ‘커다란 이야기’가 된다는 의미는 다양한 자료들과 이야기들이 함께 엮어지면서 한 편의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는 뜻이다. Lowry, The Homiletical Plot, 1장 참조.
*31 같은 책, 2장 참조.
*32 Eugene L. Lowry, The Sermon: Dancing the Edge of Mystery(Nashville: Abingdon Press, 1997), 56-89.
*33 Eugene L. Lowry, How to Preach a Parable: Designs for Narrative Sermons(Nashville: Abingdon Press, 1989), 115-120
*34 Michael E. Williams, “Preaching as Storytelling”, Journeys toward Narrative Preaching, ed. Wayne Bradley Robinson(New York: The Pilgrim Press, 1990), 114-115.
*35 설교학 교육을 위해 이러한 구분을 시도하면서도 여기에서 언급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것은 용어상의 혼동을 막기 위해서였으나 이것 역시 다소의 혼동이 야기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북미의 설교학계에서도 다소 혼동이 야기되지만 그들 역시 설교학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구분을 시도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즉 Narrative Preaching이나 Story Sermon은 용어상으로는 같은 내용이나 설교학자들은 전자는 주로 플롯을 중심으로 한 방법을, 후자는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본문의 중심 메시지를 전하는 형태, 혹은 재구성하여 다시 들려 주는 이야기 형태로 구분했다. 앞서 언급된 혼동은 설교의 방법론들이 우리말로 소개되면서 “이야기식 설교”, “이야기 설교”, 서사 설교, 혹은 설화체 설교, 스토리텔링 설교 등으로 무분별하게 사용됨으로써 용어상의 혼동이 야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36 David Buttrick, Homiletic: Moves and Structures(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7), 175.
*37 Wayne Bradley Robinson, “The Samaritan Parable as a Model for Narrative Preaching” in Journey toward Narrative Preaching, 99.
*38 Thomas G. Long, The Witness of Preaching, 정장복, 김운용 역, 『증언으로서의 설교』(서울: 쿰란출판사, 1998), 23.
*39 같은 책, 64-69.
*40 Michael E. Williams, “Preaching as Storytelling” in Journey toward Narrative Preaching, ed. Robinson, 1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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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modified: 2020-12-26 (土) 22:07:23